후진국에서 선진국까지 산업 패권의 변화
2025-10-24, G25DR
1. 서론: ’어려움’의 본질과 산업 패권의 재구성
“경쟁이 격화될수록 선진국이 하기 어려운 산업이 된다“는 명제는 현대 글로벌 경제의 복잡한 동학을 꿰뚫는 예리한 관찰이다. 그러나 이 현상을 단순히 선진국 제조업의 ’쇠퇴’로 해석하는 것은 단편적인 분석에 그칠 수 있다. 본 보고서는 이 명제를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되, 그 이면에 숨겨진 더 깊은 구조적 변화를 탐색하고자 한다. 선진국이 특정 산업에서 겪는 ’어려움’은 경쟁력을 완전히 상실하는 ’불가능’의 상태가 아니라, 글로벌 분업 구조 속에서 더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전략적 재편’ 혹은 가치사슬상의 ‘전이(Transition)’ 현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비효율’적인 부분을 포기하고 ’비교우위’가 있는 영역에 집중하는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보고서는 네 가지 다른 성격의 산업군을 심층 비교 분석한다. 첫째, 규모와 비용이 경쟁의 핵심인 전통 중공업(철강, 조선). 둘째, 시장의 규칙에 따라 패권의 주인이 갈리는 첨단 하드웨어(드론). 셋째, 보이지 않는 인프라가 실질적 지배력을 결정하는 인공지능(AI). 넷째, 기술과 신뢰가 견고한 진입장벽을 구축하는 규제 기반 기술 산업(첨단 의료기기). 이 네 가지 사례를 통해 경쟁의 양상—비용, 기술, 플랫폼, 신뢰—에 따라 선진국의 경쟁 우위가 어떻게 다르게 발현되고 재구성되는지를 입체적으로 규명할 것이다.
2. 규모와 비용의 전쟁터 - 전통 제조업의 패권 이동
전통 제조업, 특히 철강과 조선 산업은 글로벌 경쟁의 격화가 어떻게 산업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는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이 영역에서 경쟁의 규칙은 ’규모의 경제’와 ’원가 경쟁력’이라는 두 가지 변수로 요약된다. 선진국은 이 두 가지 전장에서 구조적인 어려움에 직면했고, 그 결과 글로벌 생산의 무게중심은 아시아로, 특히 중국으로 이동했다.
2.1 철강 산업: 생산의 무게중심 이동과 그 함의
지난 20여 년간 세계 철강 산업의 지도는 완전히 다시 그려졌다. 2000년부터 2023년까지 미국, 유럽, 일본, 캐나다 등 주요 선진국의 조강 생산량은 합계 19% 감소하는 동안, 전 세계 생산량은 140% 증가했다. 이 경이적인 성장의 중심에는 중국이 있었다. 같은 기간 중국의 조강 생산량은 무려 722% 폭증했으며, 2023년에는 전 세계 생산량의 54%를 차지하는 압도적인 1위 생산국으로 등극했다.1 이는 단순한 점유율 변화를 넘어 글로벌 철강 산업의 지각 변동을 의미한다. 중국의 국영기업인 바오우 그룹(China Baowu Group)이 세계 최대 철강사로 부상한 것은 이러한 변화의 상징적 결과다.3
표 1: 2000-2023년 주요국 조강 생산량 변화 추이 (중국 vs. 미국/유럽/일본)
| 지역/국가 | 2000년 생산량 (백만 톤) | 2023년 생산량 (백만 톤) | 증감률 |
|---|---|---|---|
| 중국 | 127 | 1,019 | +702.4% |
| 미국, 유럽, 일본, 캐나다 | 421 | 316 | -24.9% |
| 전 세계 | 847 | 1,892 | +123.4% |
주: 유럽, 일본, 캐나다의 2023년 생산량은 각각 87.0, 12.2백만 톤이며, 유럽 전체는 약 136백만 톤 수준이다. 표의 단순 비교를 위해 1의 ‘Europe, Japan and Canada’ 수치를 2000년(319)과 2023년(235)으로, 미국 수치를 2000년(102)과 2023년(81)으로 합산하여 재계산함. 중국 증감률은 1의 722% surge를 참고하되, 표 수치 기반으로 재계산.
출처: 1
이러한 패권 이동의 근본 원인은 비용 구조, 특히 인건비 격차에 있다. 2024년 기준 유럽연합(EU)의 시간당 평균 인건비는 33.5유로에 달하며, 룩셈부르크나 덴마크 같은 국가는 50유로를 상회한다.5 반면 중국의 인건비는 과거에 비해 크게 상승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진국 대비 현저히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6 철강과 같은 범용재(Commodity) 산업에서 원가 경쟁력은 생존의 필수 조건이며, 고비용 구조를 가진 선진국은 구조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중국의 경쟁력은 단순히 낮은 인건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베트남 등 다른 저비용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월등히 높은 생산성, 거대한 내수 시장을 기반으로 한 압도적인 규모의 경제, 그리고 정부의 전략적이고 일관된 지원 정책이 결합되어 ’비용-생산성’의 최적점을 구축했다.7 이 강력한 조합은 선진국은 물론 다른 신흥국조차 쉽게 추격하기 어려운 견고한 경쟁 우위를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2.2 조선 산업: 양적 지배와 질적 특화의 분리
조선 산업 역시 철강과 유사하게 아시아 3국이 시장을 과점하는 구조로 재편되었다. 2023년 기준, 중국이 약 46%의 시장 점유율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한국(약 30%)과 일본(약 15%)이 그 뒤를 잇고 있다.9 특히 중국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세계 최대 규모의 조선소들을 앞세워 벌크선, 컨테이너선, 탱커선 등 물량 중심의 상선 수주 시장을 장악했다.8 한때 세계 조선 시장을 호령했던 유럽과 미국의 상선 건조 시장 점유율은 이제 미미한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조선 산업의 경쟁 구도는 단순한 물량 경쟁을 넘어 가치사슬에 따른 분화 양상을 띤다. 이는 선진국이 경쟁에서 밀려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경쟁의 장을 재정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한국은 액화천연가스(LNG) 및 액화석유가스(LPG) 운반선, 해양 플랜트, 군함 등 고도의 기술력을 요구하는 고부가가치 선박 시장에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9
-
일본은 에너지 효율 설계 기술과 로봇을 활용한 자동화 공정에서 강점을 보이며, 자동차 운반선(Ro-Ro)과 같은 특정 틈새시장에 특화되어 있다.9
-
유럽 국가들(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은 전체 점유율은 낮지만 크루즈선, 특수 목적선, 슈퍼요트 등 일반 상선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초고가 시장에 집중하고 있다.8
-
미국은 상선 건조 시장에서는 거의 존재감이 없지만, 항공모함, 핵잠수함, 이지스 구축함 등 세계 최강의 군함 건조 능력을 보유하며 국방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9
이러한 현상은 선진국 조선업의 변화가 ’쇠퇴’가 아닌 ’전략적 재배치’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범용 상선 시장은 철강과 마찬가지로 원가 경쟁이 치열하며, 선진국은 이 시장에서 경쟁 우위를 상실했다. 대신, 그들은 자국의 핵심 역량—첨단 군사 기술, 럭셔리 디자인 및 엔지니어링, 복잡한 시스템 통합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시장으로 역량을 이동시켰다. 따라서 선진국 조선업이 겪는 ’어려움’은 사실이지만, 그에 대한 대응은 수동적인 ’쇠퇴’가 아닌, ‘가치사슬 상층부로의 이동’ 및 ’비교우위 영역으로의 선택과 집중’이라는 능동적인 전략적 판단의 결과인 것이다.
표 2: 2023년 글로벌 조선업 시장 점유율 및 국가별 주력 선종 비교
| 국가/지역 | 시장 점유율 (추정) | 주력 선종 (강점 분야) |
|---|---|---|
| 중국 | ~46% | 벌크선, 컨테이너선, 탱커 (양적 지배) |
| 한국 | ~30% | LNG/LPG 운반선, 해양 플랜트 (고기술·고부가가치) |
| 일본 | ~15% | 자동차 운반선(Ro-Ro), 에너지 효율 선박 (틈새시장 특화) |
| 미국 | <1% | 항공모함, 핵잠수함, 구축함 (군함) |
| 유럽 | 미미 | 크루즈선, 슈퍼요트, 특수선 (초고부가가치) |
출처: 8
3. 기술 시장의 분화 - 드론 산업의 이중적 패권 구조
드론 산업은 동일한 기술 범주 내에서도 시장의 성격에 따라 패권의 주인이 극명하게 갈리는 현상을 보여준다. 이는 “경쟁이 격화될수록 선진국이 하기 어렵다“는 가설이 어떤 조건에서는 참이지만, 다른 조건에서는 거짓이 될 수 있음을 입증하는 흥미로운 사례다. 경쟁의 ’규칙’이 무엇이냐에 따라 패권의 ’국적’이 결정되는 것이다.
3.1 상업용 드론: 중국 DJI의 압도적 지배
상업용 및 소비자 드론 시장은 사실상 중국의 DJI(大疆创新)가 평정했다. DJI는 전 세계 시장의 70% 이상, 일부 통계에서는 90%에 달하는 압도적인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10 항공 촬영용 ‘Mavic’ 시리즈부터 산업용 ‘Matrice’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DJI의 제품들은 사실상 산업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이들의 성공은 몇 가지 핵심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고성능 카메라와 짐벌 안정화 기술, 정교한 장애물 회피 시스템 등 경쟁사를 압도하는 기술력. 둘째, 빠른 제품 개발 및 출시 주기. 셋째, 중국의 강력한 제조 기반을 활용한 대량 생산으로 확보한 가격 경쟁력. 넷째,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사용자 친화적인 소프트웨어 생태계 구축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전형적인 B2C 및 B2B 범용 기술 시장의 성공 방정식을 그대로 따르며, DJI는 이 경쟁에서 서구의 경쟁자들을 대부분 시장에서 퇴출시켰다.
3.2 군사용 드론: 미국과 이상업용 시장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군사용 드론 시장에서 펼쳐진다. 이 시장은 가격이나 편의성이 아닌, 국가 안보와 직결된 가치들이 경쟁의 규칙을 지배한다. 따라서 시장의 강자 역시 다르다. 미국의 노스롭 그루먼(Northrop Grumman)이 개발한 고고도 무인정찰기 ‘글로벌 호크(Global Hawk)’, 제너럴 아토믹스(General Atomics)의 공격용 드론 ‘리퍼(Reaper)’,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명성을 떨친 에어로바이런먼트(AeroVironment)의 자폭 드론 ‘스위치블레이드(Switchblade)’ 등이 대표적이다.
1313
이 시장의 핵심 경쟁력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극한의 작전 환경에서도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절대적인 신뢰성과 생존성. 둘째, 위성 통신, 데이터 암호화 등 아군의 국방 통신망 및 지휘통제체계와의 완벽한 통합 능력. 셋째, 스텔스, 전자전 대응 등 적의 방공망을 뚫고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첨단 군사 기술의 집약. 넷째, 수십 년간 축적된 실전 운용 데이터와 노하우. 이러한 요인들은 국가 안보와 직결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동맹국을 중심으로 한 폐쇄적이고 신뢰 기반의 공급망이 형성된다.
이처럼 ’드론’이라는 동일한 기술 제품군 안에서 두 개의 다른 세계가 존재하는 현상은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상업용 드론 시장의 경쟁 규칙은 ‘빠른 혁신’, ‘규모의 경제’, ’개방형 생태계’이며, 이는 중국의 강점(신속한 의사결정, 거대 내수시장, 강력한 제조 기반)과 완벽하게 부합한다. 이 전장에서 선진국 기업들은 속도와 가격 경쟁에서 밀려 ’어려움’을 겪었다.
반면, 군사용 드론 시장의 경쟁 규칙은 ‘절대적 신뢰’, ‘시스템 통합’, ’국가 안보’다. 이 규칙은 선진국, 특히 미국의 강점(세계 최고 수준의 국방 R&D, 동맹 네트워크, 엄격한 품질 관리)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 시장에서는 경쟁이 격화될수록, 즉 임무의 중요성과 기술적 요구사항이 높아질수록 오히려 미국과 이스라엘의 지배력이 더욱 공고해진다. 결국 선진국은 모든 기술 시장에서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 기술 경쟁’에서는 어려움을 겪지만 ’국가 전략 기술 경쟁’에서는 여전히 압도적 우위를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자신들이 ’경쟁의 규칙’을 설정할 수 있는 시장을 선택하고 그곳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4. 보이지 않는 지배력 - AI 산업의 플랫폼과 생태계 경쟁
인공지능(AI) 산업은 선진국, 특히 미국이 과거 제조업 시대와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형태의 패권을 어떻게 구축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사례다. 표면적으로는 미국과 중국의 AI 모델 성능 경쟁이 치열하게 보이지만, 그 기저에는 산업의 ‘상류(Upstream)’, 즉 보이지 않는 인프라를 장악하려는 고도의 전략이 숨어 있다.
4.1 AI 패권 경쟁의 다층적 구조: 미국과 중국
AI 패권 경쟁은 여러 층위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자본력과 기초 기술력에서는 미국이 확실한 우위를 점하고 있다. 2023년 기준, 미국의 AI 분야 민간 투자액은 672억 달러로, 2위인 중국의 약 8.7배에 달했으며, 전년 대비 22.1% 증가하며 성장세를 이어갔다.16 GPT-4, Gemini, Claude 3 등 세계 최고 성능의 파운데이션 모델(Foundation Model) 개발 역시 OpenAI, Google, Anthropic 등 미국 기업들이 주도하고 있다.17 이는 막대한 자본과 최고 수준의 인재, 그리고 자유로운 연구 환경이 결합된 결과다.
표 3: 2023년 미국 vs. 중국 AI 민간 투자액 및 성장률 비교
| 국가 | 2023년 민간 투자액 | 2022년 대비 증감률 |
|---|---|---|
| 미국 | $67.2 billion | +22.1% |
| 중국 | ~$7.8 billion | -44.2% |
출처: 16
반면, 중국은 다른 측면에서 무섭게 추격하고 있다. AI 관련 특허 출원 및 논문 발표 수에서는 이미 미국을 앞서고 있으며, 미국이 주도하는 최신 모델과의 성능 격차도 빠르게 좁히고 있다.18 특히 중국은 안면인식, 스마트시티, 산업용 로봇 도입 등 특정 응용 분야에서 세계 최대 규모의 데이터를 축적하고 상용화를 주도하며 강점을 보인다.16 이는 ’기초 기술의 미국’과 ’응용 기술 및 데이터의 중국’이라는 경쟁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4.2 상류(Upstream) 지배 전략: NVIDIA의 사례
이러한 미중 경쟁의 이면에는 더 중요한 흐름이 존재한다. 바로 AI 산업의 근간이 되는 인프라를 장악하려는 경쟁이다. 그 중심에는 미국의 NVIDIA가 있다. NVIDIA는 단순히 AI 연산에 필수적인 GPU(그래픽 처리 장치)라는 하드웨어를 판매하는 회사가 아니다. 이들은 CUDA(소프트웨어 개발 플랫폼), DGX Platform(AI 개발 및 배포를 위한 통합 인프라), AI Enterprise(기업용 AI 소프트웨어 스위트), 그리고 NIM(추론 마이크로서비스)에 이르기까지, AI 모델 개발과 운영의 전 과정을 아우르는 거대한 ‘AI 공장(AI Factory)’ 솔루션을 제공한다.19
이 전략의 함의는 명확하다. 이는 AI 산업의 ‘상류’, 즉 물줄기의 가장 꼭대기를 장악하여 생태계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전 세계 거의 모든 AI 기업들—미국, 중국, 유럽을 막론하고—이 NVIDIA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플랫폼 위에서 서로 경쟁하는 구도를 만듦으로써, NVIDIA는 개별 AI 모델이나 서비스의 흥망성쇠와 무관하게 산업 전체의 성장에서 발생하는 가치를 안정적으로 흡수한다. 이는 마치 스마트폰 시대에 애플(iOS)과 구글(Android)이 수많은 앱 개발사들의 치열한 경쟁 위에서 플랫폼 지배력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창출한 것과 동일한 구조다.
1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선진국은 철강이나 선박처럼 ‘눈에 보이는’ 최종 제품 생산에서는 신흥국에 패권을 넘겨주었다. 이는 원가와 규모의 경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AI 시대에 선진국(미국)은 전혀 다른 전략을 구사한다. ‘눈에 보이는’ AI 서비스(챗봇, 이미지 생성 앱 등) 시장에서의 경쟁뿐만 아니라, 그 서비스들을 만드는 데 반드시 필요한 ‘보이지 않는 인프라’(반도체 칩, 개발 플랫폼, 소프트웨어 도구)를 완벽하게 장악하는 것이다.
이 인프라를 장악하면, 경쟁국인 중국의 AI 기업이 성장하고 더 많은 AI 서비스를 출시할수록 역설적으로 자국 기업인 NVIDIA의 매출과 영향력은 더욱 커지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는 경쟁을 통해 패권을 잃는 것이 아니라, 경쟁을 자양분으로 삼아 패권을 더욱 강화하는 새로운 방식의 지배 전략이다. 따라서 AI 산업에서 선진국이 ’어려움’을 겪는 것은 응용 서비스 분야의 치열한 경쟁에 한정될 수 있다. 그러나 산업의 근간이 되는 플랫폼과 인프라를 장악함으로써, 선진국은 과거 제조업 시대와는 질적으로 다른, 훨씬 더 강력하고 지속 가능한 형태의 기술 패권을 구축하고 있다.
5. 넘을 수 없는 벽 - 초격차 기술과 규제의 해자(垓子)
어떤 산업은 경쟁이 격화될수록 오히려 기존 강자의 지위가 더욱 굳건해지는 역설적인 현상을 보인다. 특히 인간의 생명과 안전에 직결되는 분야에서는 기술적 진입장벽에 더해 ’신뢰’와 ’규제’라는 보이지 않는 해자(垓子)가 후발주자의 추격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첨단 의료기기 산업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다.
5.1 첨단 의료기기: 선진국의 견고한 수출 지배력
MRI, CT 스캐너, 양성자 치료기 등 고도의 기술이 집약된 첨단 의료기기 시장의 글로벌 무역 데이터는 선진국의 압도적인 지배력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 분야의 순수출 상위 국가는 예외 없이 미국, 독일, 스웨덴, 영국, 네덜란드, 이스라엘 등 전통적인 기술 강국들이다.23 이들 국가는 수십 년간 축적된 연구개발 역량을 바탕으로 ’고도로 산업화’되었으며 ’첨단 의료 기술의 생산 수단’을 보유한 것으로 평가된다.23
반면, 중국이나 인도와 같이 거대한 내수 시장과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룬 국가들조차 이 분야에서는 막대한 무역 적자를 기록하는 순수입국에 머물러 있다.23 이는 자체적인 첨단 기술력 부족으로 인해 고가의 핵심 장비를 전적으로 선진국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23 범용 제조업에서 보여준 이들 국가의 빠른 추격(fast-follower) 전략이 첨단 의료기기 시장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5.2 경쟁우위의 원천: 기술과 신뢰의 이중 장벽
선진국이 이 분야에서 넘을 수 없는 벽을 구축한 비결은 두 가지 차원의 강력한 해자에 있다.
첫 번째는 ’기술적 해자’다. 첨단 의료기기는 단순히 부품을 조립하여 만들 수 있는 제품이 아니다. 수십 년에 걸친 기초과학 연구, 천문학적인 R&D 투자, 나노미터 수준의 정밀공학 기술, 그리고 복잡한 데이터를 해석하고 시각화하는 고도의 소프트웨어 기술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시스템의 산물이다. 이는 단기간에 자본을 집중적으로 투입한다고 해서 쉽게 따라잡을 수 없는, 매우 깊고 넓은 기술적 장벽을 형성한다.
두 번째이자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규제 및 신뢰의 해자’다. 모든 의료기기는 시장에 출시되기 전에 각국 규제 당국의 엄격한 인허가 절차를 거쳐야 한다. 특히 미국 식품의약국(FDA)이나 유럽 의약품청(EMA)의 승인을 받기 위해서는 제품의 안전성과 유효성을 입증하기 위한 길고 까다로운 임상시험과 데이터 검증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이는 후발 주자에게는 엄청난 시간과 비용 부담으로 작용하는 강력한 제도적 진입장벽이다. 더욱이, 인간의 생명과 건강을 다루는 분야의 특성상, 최종 사용자인 병원과 의사들은 오랜 기간 임상 현장에서 성능과 안전성이 검증된 기존 선진국 브랜드의 제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한번 구축된 ’신뢰’는 후발주자의 가격 경쟁력을 무력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이러한 현상은 경쟁의 본질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철강, 상업용 드론과 같이 경쟁의 핵심이 ’성능 대비 가격(가성비)’과 ’속도’인 산업에서는 후발주자가 선두를 빠르게 추격하거나 역전할 수 있다. 그러나 첨단 의료기기처럼 경쟁의 핵심이 ’검증된 안전성’과 ’장기적 신뢰’인 산업에서는 상황이 정반대다. 기술이 발전하고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소비자(병원/의사)는 오히려 ’실패 비용’이 치명적인 선택을 피하려 한다. 즉, 약간의 가격 차이보다는 수십 년간 쌓아온 브랜드 평판과 규제 당국의 공신력이라는 ’신뢰 자본(Trust Capital)’을 선택하는 경향이 더욱 강해진다. 따라서 사용자의 가설은 ’신뢰’가 핵심 경쟁력이 아닌 산업에 국한되며, 반대로 높은 수준의 신뢰가 요구되는 산업에서는 경쟁이 격화될수록 오히려 오랜 기간 신뢰 자본을 축적해 온 선진국의 지위가 더욱 공고해지는 역설이 발생한다.
6. 결론: 선진국 산업의 진화 - ’포기’가 아닌 ‘선택과 집중’
“경쟁이 격화될수록 선진국이 하기 어려운 산업이 된다“는 가설은 글로벌 경제의 특정 단면을 정확하게 포착한다. 범용 제품의 대량 생산이라는 ‘규모와 비용의 전쟁터’(제1장)에서는 이 명제가 명백한 사실로 입증되었다. 그러나 이는 전체 그림의 일부에 불과하다. 선진국은 이 ’어려움’에 직면하여 무기력하게 쇠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동력으로 삼아 자국의 비교우위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산업 구조를 고도화하고 새로운 형태의 패권을 구축하고 있다.
본 보고서에서 분석한 네 가지 산업군은 선진국의 이러한 전략적 전환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
가치사슬 상층부로의 이동: 철강, 범용 상선 등 원가 경쟁이 치열한 분야의 생산은 과감히 포기하거나 아웃소싱하는 대신, LNG 운반선, 군함, 크루즈선과 같이 고도의 기술력과 엔지니어링 역량이 요구되는 고부가가치 특화 제품 시장에 집중한다.
-
경쟁의 장(場) 분리 및 선택: 속도와 가격이 중요한 소비자 기술 시장(상업용 드론)에서의 소모적인 경쟁을 피하고, 절대적인 신뢰와 국가 안보가 핵심인 전략 기술 시장(군사용 드론)을 선택하여 자신들이 설정한 규칙 안에서 경쟁 우위를 유지한다.
-
‘보이지 않는 인프라’ 장악: 최종 제품(AI 서비스) 시장의 직접적인 경쟁자가 되기보다, 그 경쟁의 판을 깔아주는 플랫폼과 기반 기술(반도체, 개발 도구)을 장악함으로써 산업 생태계 전체를 지배하고 경쟁의 과실을 흡수한다.
-
’신뢰와 규제’의 해자 강화: 기술적 진입장벽에 더해, 수십 년간 쌓아온 제도적 신뢰와 엄격한 규제 시스템을 통해 후발주자의 추격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산업(첨단 의료기기)에서 독점적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한다.
결론적으로, 선진국이 겪는 ’어려움’은 산업 패권의 종말을 예고하는 비관적 신호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맞는 패권을 재구축하기 위한 ’성장통’이자 필연적인 진화 과정이다. 그들은 더 이상 모든 것을 생산하지 않는다. 대신, 가장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누구도 쉽게 대체할 수 없으며, 산업의 규칙 자체를 설정할 수 있는 핵심 영역을 날카롭게 ’선택’하고 모든 역량을 ’집중’함으로써 글로벌 경제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더욱 정교하고 강력하게 유지하고 있다. 이는 경쟁에서의 ’포기’가 아닌, 가장 현명한 ’선택과 집중’의 결과다.
7. 참고 자료
- Evolution of the Global Steel Industry (1967–2023): China as the …, https://www.voronoiapp.com/economy/-Evolution-of-the-Global-Steel-Industry-19672023-China-as-the-Driving-Force-1839
- List of countries by steel production -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countries_by_steel_production
- World Steel in Figures 2024 - worldsteel.org, https://worldsteel.org/data/world-steel-in-figures/world-steel-in-figures-2024/
- 2023 World Steel in Figures, https://worldsteel.org/wp-content/uploads/World-Steel-in-Figures-2023.pdf
- Hourly labour costs - Statistics Explained - Eurostat - European Commission, https://ec.europa.eu/eurostat/statistics-explained/index.php/Hourly_labour_costs
- Charting International Labor Comparisons (2011 Edition) : U.S. Bureau of Labor Statistics, https://www.bls.gov/fls/chartbook/section3.htm
- Global Labor Rate Comparisons | Reshoring Institute, https://reshoringinstitute.org/wp-content/uploads/2022/09/GlobalLaborRateComparisons.pdf
- Top 10 Ship Building Countries In The World - Marine Insight, https://www.marineinsight.com/know-more/top-10-ship-building-countries-in-the-world/
- The Ship Wars: China, South Korea, Japan, America & India – Who’s …, https://www.taxtmi.com/article/detailed?id=14396
- Commercial Drones Statistics and Facts (2025) - Market.us Scoop, https://scoop.market.us/commercial-drones-statistics/
- Leading Companies in the Global Commercial Drone Market 2025, https://www.intellectualmarketinsights.com/blogs/leading-companies-in-the-global-commercial-drone-market-2025
- DJI -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DJI
- Top Companies List of Military Drone Industry - MarketsandMarkets, https://www.marketsandmarkets.com/ResearchInsight/military-drone-market.asp
- Top Military Drone Stocks 2025: Pure-Play Watchlist - Exoswan Insights, https://exoswan.com/military-drone-stocks
- Top 12 Military Drone Manufacturers & Companies in 2025 - Expert Market Research, https://www.expertmarketresearch.com/blogs/top-military-drone-manufacturers
- Economy | The 2024 AI Index Report | Stanford HAI, https://hai.stanford.edu/ai-index/2024-ai-index-report/economy
- Artificial Intelligence Index Report 2024 - AWS, https://hai-production.s3.amazonaws.com/files/hai_ai-index-report-2024-smaller2.pdf
- The 2025 AI Index Report | Stanford HAI, https://hai.stanford.edu/ai-index/2025-ai-index-report
- AI Data Platform for Enterprise Agentic AI | NVIDIA, https://www.nvidia.com/en-us/data-center/ai-data-platform/
- AI Agents: Built to Reason, Plan, Act - NVIDIA, https://www.nvidia.com/en-us/ai/
- DGX Platform: Built for Enterprise AI - NVIDIA, https://www.nvidia.com/en-us/data-center/dgx-platform/
- NVIDIA AI Enterprise | Cloud-native Software Platform, https://www.nvidia.com/en-us/data-center/products/ai-enterprise/
- Most influential countries in the international medical device trade …, https://pmc.ncbi.nlm.nih.gov/articles/PMC9250171/